어제 베트남노동자 파업 구속사건 공판기일이 있었습니다. 선고기일은 2011.6.23.10:00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아쉬움이 많지만 절차적으로 몇 가지 문제점을 공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피고인들의 공판정에서 수갑착용 문제입니다. 제가 선임해서 들어간 지난 기일과 어제 기일에도 피고인들은 수갑을 찬 채 재판을 받았습니다. 지난 기일에 단체 분 들이 방청석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수갑을 풀어달라고 요구를 하였으나, 판사는 피고인들 수가 많아서 사고가 발생하면 제압할 수가 없으니 법에 따라 그렇게 운용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현재 구속된 피고인 수는 10명입니다. 그런데 저는 지난 용산참사 때도 그렇고 피고인이 법정에서 수갑을 찬 채 재판받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

형사소송법 280조에는 '공판정에서는 피고인의 신체를 구속하지 못한다. 다만, 재판장은 피고인이 폭력을 행사하거나 도망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피고인의 신체를 구속을 명하거나 기타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판사가 예외규정을 남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사건을 결심이 되었지만, 다음에 이런 경우가 있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두 번째는, 어제 증인신문 때, 회사 측 증인들의 요구에 의해, 피고인들과 방청석을 나가게 한 후 증인신문이 진행이 되었습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는 이유였습니다. 지난 기일에도 그렇게 진행이 되었다고 합니다. 피고인들이 증인의 신문을 직접 듣고 반대신문의 기회를 가져야 하는데, 방어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른 변호사에게 들은 팁은 다음에 그런 일이 생기면 판사에게 증인신문 영상녹화를 요구하여 나중에 피고인들에게 보여주고 반대신문을 할 수 있는 기일을 한 번 더 잡아달라고 요구하거나, 증인신문방이 따로 있는 곳은 영상을 통하여 피고인들이 볼 수 있도록 요구하라고 하네요.

아무튼 통역 문제도 그렇고 절차적으로 아쉬운 점이 너무 많은데, 제가 처음부터 지원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속기간이 상당한 후 결심했던 사건을 나중에 선임하고 변론재개신청해서 촉박하게 진행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미진한 부분은 변론요지서에 다 담아야 할텐데요..

 

성폭력 피해여성의 죽음

카테고리 없음 | 2011. 6. 15. 18:43
Posted by 장변

*민우회 칼럼에 기고한 글
http://www.womenlink.or.kr/nxprg/board.php?ao=view&bbs_id=main_column&page=&doc_num=121

성폭력 피해여성이 법정 증언 후 자살하였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그녀는 유서에 법정에서 판사의 질문에 모멸감을 느꼈다는 내용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법원 관계자는 기자들에게 "성폭행이 아닐 가능성이 있어 재판부가 사실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려 했을 뿐 모욕은 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고 한다.

성폭력 사건에서 판사가 피해자에게 ‘정확히 파악하려는 사실관계’는 뭐였을까. 기사에 의하면 당시 공판에서 가해자의 변호인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인터넷 채팅으로 이미 2차례 만났고 장소가 피해자의 고시원인 점을 들어 일방적인 성폭행이 아니라는 취지로 변론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피해자가 과거에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면서 손님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고소했다가 합의금을 받고 고소취한 일도 거론하였다고 한다. 이에 판사도 변호인의 신문이 끝난 뒤 이 사건을 거론하면서 “가해자가 어학연수생이고 합의금을 공탁하겠다고 하는데 합의하는 게 어떠냐”고 물은 것으로 알려졌다.

성폭력 여부를 판단하는데 있어 피해 여성의 과거 또는 현재의 직업이 무엇이고, 과거 성폭력 당하거나 합의한 전력여부가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 사실관계인가. 이러한 질문자체가 성폭력과 여성에 대한 편견에 근거해 있는 것 아닌가. 그 자체가 모욕적인 질문이 아닌가.

성폭력 피해자의 2차 피해에 대하여 오랫동안 문제제기를 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수사절차나 재판절차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은 충분히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재판절차에서 가해자들은 변호인을 선임하는데 반해, 일반적으로 피해자들은 변호인 없이 혼자서 방어해야하는 불균형이 발생한다. 이러한 불균형 속에서 수사절차나 재판절차에서 가해자의 변호인들이 피해자들에게 가하는 불필요한 질문이나 편견에 근거한 공격에도, 검사나 판사가 제지하기는커녕, 그 편견에 근거한 심증을 드러내면, 피해자 입장에서는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판사들이 법정에서 무심하게 내뱉는 말들도 문제다. 판사들 중에는 법리에는 밝을지 몰라도,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나 배려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법정에서 가해자들을 앞에 두고 증언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고통스럽고 어렵다. 이러한 고통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나 배려도 없이 무심하게 내뱉는 말들이 성폭력 피해여성들을 두 번 죽이는 것이다.

피해여성은 유서를 통해 자신이 죽어야만 자신의 말을 믿어줄 것이라는 내용을 남겼다고 한다. 그녀가 겪었을 억울함과 절망감이 느껴진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말이 죽음을 통해서만 사회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신뢰를 얻는 상황이 너무 안타깝다.


글 장서연

 

관용이 타자의 거부와 동화라는 두 극단 사이의 중용이라면, 이는 덕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절박한 필요성에 의해 제기된 것이다. 관용은 잠재적으로 해로울 수 있는 차이를 포용하는 덕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차이로 재현된 위협을 관리하는 방식이다. 관용은 그 대상의 타자성을 계속 유지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타자성 관리 방식이다. 관용의 대상은, 전체 내부로 편입된 후에도 여전히 표지된marked 채 남아 있다. 관용은 이런 식으로 특정한 대상을 편입을 통해 관리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이들에게 외부인의 자리를, 더 나아가 정치체나 사회체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의 자리를 할당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오늘날 다문화주의의 관용에 대한 호소에는, 단순한 “행복한 차이의 공동체”에 대한 추구 이상의 것이 존재하며, 우리는 이러한 다문화주의의 구상 내부에 존재하는 규범과 적대를 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야 비로소 우리는, 사회 내에서 어떠한 것이 가치 있다고 평가되고 어떠한 것이 이러한 가치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는지, 오늘날 항구적인 이질성과 증오가 어떤 식으로 상상되고 있는지, 그리고 이 이질성과 증오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관용은 자유주의적 평등의 형식주의로 해결되지 않는, 특히 자신이 사회,문화,종교적 삶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극구 부인하는 자유주의적 법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사회,문화,종교적 문제를 관리하기 위해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형식적 평등이 이미 존재하는 곳에서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한 관용은, 그 집단을 주변화해 온 규범의 해게모니를 손상시키지 않은 채 주면 집단을 내부화하고 그들의 요구를 관리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된다.


관용의 대상이 되는 개인들은, 규범에 일치하는 이들이 아니라 규범에서 이탈한 이들이다.
하지만 역으로 이들은 관용담론 그 자체를 통해, 일탈적 개인들로 한층 더 분절된다. 관용 담론은 사회 질서를 ‘관용하는 이들’과 ‘관용되어야 하는 이들’로 은밀히 이분화 하는데, 이 때 관용되어야 하는 이들은 규범에서의 일탈을 통해 개인화되면, 이 개인화 과정에서 자신의 진리를 고백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늘 관용 담론이,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규율적 전략으로 기능하는 방식이다.


관용하라는 가르침에는, 개인의 주체성을 집단 정체성의 산물로 환원시킴으로써, 관용의 대상이 되는 이들의 타자성을 과장하고 물화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결과적으로 관용담론은 관용대상이 가진 차이를 규범적이고 세속적이며 중립적인 것과 대립시키고 물화함으로써, 이미 주변적인 이들을 한층 더 주변화시킬뿐더러 모든 타자성을 관용의 대상이 되는 이들의 몫으로 떠넘긴다.


의견이나, 믿음에 대한 관용에서 인격체에 대한 관용으로의 변화는, 특수한 믿음과 가치관이 주체 그 자체에 의해 포기될 때에도, 차이는 여전히 주체안에 기입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공적 질서를 유지하는 선에서 사적인 믿음을 승인하려던 관용의 애초의 목적은 완전히 전도되어, 이제 관용은 공통적인 것 내부에 본질화된 타자성을 각인시키는 하나의 방법이 되었다. 관용은 차이를 본질화하고 섹슈얼리티, 인종의 문제를 물신화함으로써, 섹슈얼리티, 인종이라고 불리는 차이들을 생산해 온 역사와 권력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웬디 브라운의 <관용>, 제2장 권력의 담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