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이 타자의 거부와 동화라는 두 극단 사이의 중용이라면, 이는 덕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절박한 필요성에 의해 제기된 것이다. 관용은 잠재적으로 해로울 수 있는 차이를 포용하는 덕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차이로 재현된 위협을 관리하는 방식이다. 관용은 그 대상의 타자성을 계속 유지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타자성 관리 방식이다. 관용의 대상은, 전체 내부로 편입된 후에도 여전히 표지된marked 채 남아 있다. 관용은 이런 식으로 특정한 대상을 편입을 통해 관리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이들에게 외부인의 자리를, 더 나아가 정치체나 사회체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의 자리를 할당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오늘날 다문화주의의 관용에 대한 호소에는, 단순한 “행복한 차이의 공동체”에 대한 추구 이상의 것이 존재하며, 우리는 이러한 다문화주의의 구상 내부에 존재하는 규범과 적대를 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야 비로소 우리는, 사회 내에서 어떠한 것이 가치 있다고 평가되고 어떠한 것이 이러한 가치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는지, 오늘날 항구적인 이질성과 증오가 어떤 식으로 상상되고 있는지, 그리고 이 이질성과 증오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관용은 자유주의적 평등의 형식주의로 해결되지 않는, 특히 자신이 사회,문화,종교적 삶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극구 부인하는 자유주의적 법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사회,문화,종교적 문제를 관리하기 위해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형식적 평등이 이미 존재하는 곳에서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한 관용은, 그 집단을 주변화해 온 규범의 해게모니를 손상시키지 않은 채 주면 집단을 내부화하고 그들의 요구를 관리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된다.


관용의 대상이 되는 개인들은, 규범에 일치하는 이들이 아니라 규범에서 이탈한 이들이다.
하지만 역으로 이들은 관용담론 그 자체를 통해, 일탈적 개인들로 한층 더 분절된다. 관용 담론은 사회 질서를 ‘관용하는 이들’과 ‘관용되어야 하는 이들’로 은밀히 이분화 하는데, 이 때 관용되어야 하는 이들은 규범에서의 일탈을 통해 개인화되면, 이 개인화 과정에서 자신의 진리를 고백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늘 관용 담론이,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규율적 전략으로 기능하는 방식이다.


관용하라는 가르침에는, 개인의 주체성을 집단 정체성의 산물로 환원시킴으로써, 관용의 대상이 되는 이들의 타자성을 과장하고 물화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결과적으로 관용담론은 관용대상이 가진 차이를 규범적이고 세속적이며 중립적인 것과 대립시키고 물화함으로써, 이미 주변적인 이들을 한층 더 주변화시킬뿐더러 모든 타자성을 관용의 대상이 되는 이들의 몫으로 떠넘긴다.


의견이나, 믿음에 대한 관용에서 인격체에 대한 관용으로의 변화는, 특수한 믿음과 가치관이 주체 그 자체에 의해 포기될 때에도, 차이는 여전히 주체안에 기입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공적 질서를 유지하는 선에서 사적인 믿음을 승인하려던 관용의 애초의 목적은 완전히 전도되어, 이제 관용은 공통적인 것 내부에 본질화된 타자성을 각인시키는 하나의 방법이 되었다. 관용은 차이를 본질화하고 섹슈얼리티, 인종의 문제를 물신화함으로써, 섹슈얼리티, 인종이라고 불리는 차이들을 생산해 온 역사와 권력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웬디 브라운의 <관용>, 제2장 권력의 담론 중에서

 

여성학자 정희진 씨는 “‘표현의 자유’도 누가 누구를 상대로 하는 주장인가가 중요하다. 백인이 흑인을 비하하는 것, 남성이 여성을 비하하는 것, 호모포비아를 드러내는 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다. 근대에 강력한 국가주의가 들어서면서 거대한 국가권력에 비해 약한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표현, 집회, 사상의 자유 등을 인정했다. 즉, 지배규범에 대한 사회적 약자의 권리일 때만이 표현의 자유는 진보적 가치로서 존중되는 것이다.”라는 점을 말했다.(<월간 인권연대> ‘29차 수요대화모임 지상중계(3.23)’에서)

<참세상> 성소수자, 우리 인생의 황금기를 위하여
[기고] 다같이 행복해지기 위한 커밍아웃, “우리 여기 존재한다.”
안미선(자유기고가) 2011.05.18 18:12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61565

"“커밍아웃은 끊임없는 숙제다. 매일매일 다르게 써야 하고 또 다른 숙제가 있다”는 영화 속 준문 씨의 말처럼 끝없이 고단한 과제이기는 하지만 성적소수자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목소리를 통해 사회에 굳게 내면화된 차별에 항거를 이미 시작했다. <종로의 기적>에 나온 한 주인공으로 최영수 씨가 있다. 시골 게이였던 그는 혼자 오랜 시간 정체성을 고민하고 외롭게 살다가 자신과 같은, 자신을 긍정해주는 친구들을 종로에서 만나 G보이스에서 신나게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 “한 줄로 세우는 질서를 넘어간다, 우리의 길로!” 노래하며 그는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라고 웃었다. 그리고 그 기쁨을 누리게 된 지 얼마 안 되어 연습을 하던 중 뇌수막염으로 쓰러졌다. 무지개 깃발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는 그의 영정 앞에서 친구와 가족들은 울었다. 그는 죽기 직전에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누구에게나 삶은 소중하고 단 한 번의 것이다.

그리 길지 않은 삶에서 자기 인생의 황금기를 누릴 기회는 누구나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나다울 수 있는 단 한 번의 시간, 그것이 우리 삶을 인간다운 것으로 만들고 세상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에서 행복하기 위해 성적소수자들은 싸우고 있고 마찬가지 이유로 그 싸움에 함께하는 이들이 있다."
-안미선, 위의 글 중

 

한국의 '다문화' 정책은 허구다

카테고리 없음 | 2011. 5. 18. 17:16
Posted by 장변

5월 20일은 한국 정부가 정한 ‘세계인의 날’이다. 법무부는 “세계인의 날을 맞아 국민과 재한외국인이 서로를 이해하고 어우러지는 소통과 화합의 장을 마련하기 위한 기념행사를 서울광장에서 개최한다”고 한다. 그러나 참가자들을 동원하여 민속의상을 입하고, 유명가수를 부르고, 기념사진을 찍는 행사를 개최한다고 해서 소통과 화합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주민들을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차별을 해소하고, 최소한의 인권, 노동권, 평등권을 보장하는 일이 우선이다.

                                    * 2010년 제3회 세계인의 날 기념행사

그러나 법무부는 불과 며칠 전에도, 헌법재판소의 공개법정에서 이주노동자의 헌법상 기본권, 노동3권을 부정하였다. 한국 정부는 여전히 이주노동자의 노동조합을 부정하고 있으며, 이주노조 현 위원장에 대한 체류연장을 불허하고 출국명령을 하였다. 한국 대법원은 4년이 넘도록 이주노조 설립신고반려처분취소사건의 판결을 미루고 있다.

나아가 한국 정부는 이주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가장 낮은 수준의 약속인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보호에 관한 국제협약’ 가입을 거부하고 있고, 이주과정에서 취약한 지위의 이주민을 상대로 발생하는 사기, 폭력, 인신매매 등 피해구제 및 대책마련에 소홀하다. 강제노동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임금인상을 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고, 이주노동자를 값싼 노동력으로 취급하는 단기순환 정책을 고수하고 있으며,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합법화 조치에서 비동포 이주노동자들은 제외하였다. 폭력적인 강제단속과정은 여전히 사회문제가 되고 있고, 고용허가제의 기간만료가 다가옴에 따라 이주노동자의 미등록 상태가 양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성과 개선의 대책이 없다.

                                           * 2010년 제3회 세계인의 날 기념행사

또한 최근 결혼이주민에 대하여 체류자격 및 국적취득의 요건을 엄격하게 강화하여, 결혼이주여성의 법적 지위를 더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정부의 ‘외국인사회통합’ 정책의 주된 대상은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이주여성과 가족들이고, 이주노동자의 가족과 아동들, 유학생 부부,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이주남성과 자녀들, 난민들은 소외당하고 있다. 이러한 선별적 사회통합 정책은 한국 정부의 ‘다문화’ 정책이 그 포장과 달리, 지독한 가부장적 혈통주의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주민들은 한국 사회의 문화적 다양성을 풍요롭게 해주는 존재들이다. 일방적인 행정행위의 대상이 아닌 “인간의 존엄을 가진 사람”이다. 한국 사회가, 이주노동자를 ‘값싼 노동력’으로, 결혼이주여성을 ‘저출산 대책’으로,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범죄자’로, 난민들을 ‘사회적 비용’으로 취급하는 한, 한국의 ‘다문화’ 정책은 허구이며, 차별이다.

 

 

                                                * 제4회 세계인의 날 홍보대사 위촉식


 






 






 


















 

2011. 5. 12. 14:00 헌법재판소 공개변론
2008헌마430 긴급보호 및 보호명령 집행행위 등 위헌확인 사건

1. 이 사건은 2008년 5월에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 위원장, 부위원장이었던 청구인들에 대한 피청구인들의 강제단속, 강제퇴거 집행행위에 대한 위헌결정을 구하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개요 및 구체적의 경위는 변론요지서를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분명히 할 점은, 청구인들이 헌법소원을 청구한 심판대상은 긴급보호, 보호, 강제퇴거명령의 행정처분이 아닌 각 집행행위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 심판대상행위들은 표면적으로는 출입국 행정절차를 띄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청구인들에 대한 표적단속으로부터 시작하여 기습적으로 집행된 강제퇴거까지, 일련의 과정에서 청구인들의 노조활동에 대한 불이익조치로서 피청구인들의 권력적 사실행위가 직접적인 문제가 된 것이고, 이 사건 심판대상 행위들은 행정처분과 공통된 위헌사유도 있지만, 각 집행과정에서 독자적으로 문제되는 위헌사유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 사건 심판대상 행위에서 공통적으로 문제된 노동3권 침해여부를 먼저 살펴보고, 다음으로 긴급보호와 보호의 집행행위의 위헌성, 마지막으로 강제퇴거명령 집행행위의 위헌성을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2. 피청구인은, 청구인들에 대한 단속은 불법체류 외국인들에 대한 통상적인 단속과정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각 집행행위의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통상적인 출입국 절차와 다른 점이 많습니다. 청구인들은 2008년 5월 2일 저녁 8시경,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각각 조합 사무실과 집에서 단속이 되었습니다. 이는 이주노동조합 전임임원이었던 2대 집행부의 경우와 똑같은 방식이었습니다. 2007년 11월 27일경에도 이주노조 위원장, 부위원장, 사무국장이었던 외국인 노동자 3명은 같은 날 각각 다른 장소에서 단속이 되었고, 당시에도 국가인권위원회의 진정조사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 3시경에 기습적으로 강제퇴거 집행이 완료된 바가 있습니다.

또한 이주노조 초대 위원장의 경우에도 2005년 5월경 노조설립신고를 한지 불과 보름만에 단속이 되어 강제퇴거를 당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 이주노조 위원장은 2011년 2월에 합법적인 고용허가제 체류자격을 취소당하였습니다. 이처럼, 이주노조 임원들은 모두 예외 없이 강제퇴거 당하거나 합법적인 체류자격 마저 취소된 상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국제노동기구 ILO의 결사의자유위원회도 2009. 3. 경 청구인들 및 이주노동조합 전임 간부들이 이주노동조합 간부로 선출된 직후 잇달아 체포되고 강제퇴거 당한 사실을 인정한 다음, 한국 정부에게 “노동조합 활동을 심각하게 방해할 수 있는 조치들을 예방하기를 요청”한 사실도 있습니다.

그리고 통상적으로 출입국 강제퇴거집행 절차에서 항공권은 외국인의 자비로 구입하여야 하고,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진정조사 중인 사건이나, 행정소송이 계류 중인 사건에 있어서 당사자의 의사에 반하여 강제퇴거 집행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문 일입니다. 그런데 유독 이주노동조합 임원들의 경우에만, 자신의 강제퇴거 집행일이 언제인지도 모른채 당사자들의 의사에 반하여 기습적으로 강제퇴거가 집행이 되어 왔습니다.

이처럼 피청구인 법무부의 이주노동조합 핵심임원들에 대한 일련의 불이익조치들과 청구인들에 대한 이 사건 각 집행행위는, 한국정부가 이주노동조합 설립신고를 반려하고 이주노동조합을 부정하는 일관된 입장에서, 이주노조활동에 대한 차별적이고 보복적인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써, 청구인들의 노동3권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3. 한편, 피청구인은 출입국관리법상 체류자격 없는 외국인노동자인 청구인들에게 헌법상 노동3권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헌법 제33조 제1항은 국민과 외국인의 차별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노동3권은 사회, 경제적 약자인 노동자가 노동자단체의 단결된 힘에 의해 사용자와 실질적 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한 미국연방대법원의 판결은 참고할 만합니다. 미연방대법원은 “미등록 외국인노동자들이 노조활동 참여로 인하여, 고용주 위협으로부터의 보호에서 제외된다면, 이들은 합법적으로 체류하는 노동자들 공동의 목표와는 무관한 하위노동계층을 형성하여 노동자단결과 효과적인 단체교섭에 해가 될 것이다.”라는 이유로 미등록 외국인노동자들의 노동3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판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노동3권을 출입국관리법상 체류자격 유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인 개념에서 '노동자성'이 인정이 되는 모든 노동자에게 보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4. 다음으로, 이 사건 긴급보호 및 보호 집행행위의 위헌성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출입국관리법 제51조의 ‘보호’는 그 사전적 의미와 달리 실질적으로 외국인의 인신을 구속하는 행정상 강제처분입니다. 법관의 영장 없이도 신체의 자유를 중대하게 제약하는 강제처분을 할 수 있도록 한 규정은 헌법 제12조 제3항의 사전영장주의를 위배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불법체류 외국인의 경우, 강제퇴거 대상임이 명백하여 영장주의 적용이 의미가 없다는 의견도 있으나, 체류자격 유무, 강제퇴거 여부에 대한 보강조사가 필요한 경우도 있고, 이 사건에서처럼 인신구속과정의 위법성이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으며, 아동, 임산부, 난민신청자 등 인신구속이 부적절한 경우 등 인신구속의 적부에 관하여 법원의 판단이 필요한 경우가 다수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이미 “우리 헌법 제12조에 규정된 '신체의 자유'는 수사기관 뿐만 아니라 일반 행정기관을 비롯한 다른 국가기관 등에 의하여도 직접 제한될 수 있으므로, 헌법 제12조 소정의 '체포·구속' 역시 포괄적인 개념으로 해석해야”한다고 판시한 바가 있고(헌법재판소 2004. 3.25. 선고 2002헌바104 결정), “만일 어떤 법률조항이 영장주의를 배제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없을 정도로 급박성이 인정되지 아니함에도 행정상 즉시강제를 인정하고 있다면, 이러한 법률조항은 이미 그 자체로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반되어 위헌이다”라고 판시한바가 있습니다(헌법재판소 2002. 10. 31. 선고 2000헌가12).

그런데 출입국관리법 제51조 제1항에 의한 보호명령제도는 법관의 영장을 발부받도록 한다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급박성이 있는 경우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긴급한 경우에는 동조 제3항에서 긴급보호라는 예외규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사건 긴급보호 집행행위는 사전에 계획적으로 이루어졌고, 실제 청구인들의 노동조합 사무실 앞이나, 집에서 집행된 것이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우연히 발견한 경우와 같이 긴급성이 있는 경우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긴급성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이 사건 긴급보호와 법관의 영장 없이 청구인들의 인신을 구속한 이 사건 보호의 집행행위, 그리고 그 근거법률 출입국관리법 제51조 제1항은 헌법 제12조를 위배하여 청구인들의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 것입니다.

5. 나아가, 청구인 소부르 압두스의 경우, 단속반원들이 영장 없이 청구인의 집까지 들어와 단속하였는데, 이는 청구인의 주거의 자유를 침해한 것입니다.

6. 다음으로 이 사건 강제퇴거 집행행위의 위헌성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청구인들이 체류자격 없는 외국인이라고 하여도, 강제퇴거절차에서 그 적법여부에 대하여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피청구인들은 청구인들에 대한 행정소송 및 효력정지신청사건이 계속 중인 사실을 알면서도, 2008년 5월 15일경 강제퇴거 집행을 완료하였습니다. 이는 청구인들이 법관의 면전에서 공격, 방어할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한 것이며, 청구인들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입니다.

7. 또한 청구인들에게는 이 사건 강제퇴거 절차에서 선임된 변호인들이 있었고, 출입국관리법에 따른 이의신청 시에도 변호인들이 청구인들을 대리하였습니다. 그런데 피청구인들은 청구인들의 변호인들에게 이의신청의 결과를 알리지 않은 채 강제퇴거 집행을 개시하여, 이 사건 강제퇴거 집행 과정에서 청구인들이 변호인을 접견할 기회를 박탈하여 변호인의 조력권을 침해하였습니다.

8. 이와 같이 피청구인들은 강제퇴거집행을 하여야할 급박한 사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외국인들과 달리 유독 이주노동조합 임원들에 대하여만 강제퇴거 집행을 기습적으로 완료하는 것은, 합리적인 이유 없이 청구인들을 이주노동조합의 임원이라는 이유로 차별하여 평등권을 침해한 것입니다.

9. 또한 피청구인들은 진정조사 완료시까지 강제퇴거 집행을 정지하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긴급구제 결정을 무시하고, 청구인들의 국가인권위원회에 의하여 공정한 조사를 받을 권리를 침해하였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비록 법률에 의하여 설립된 국가기관이지만, 헌법 제10조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할 국가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헌법상 국가에 부여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한 국가기관으로서, 1993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국가인권기구 지위의 원칙’에 따라 국제인권규범 실행을 위한 준국제기구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하고 공정한 조사를 받을 권리는 헌법적 차원에서 열거되지 않은 기본권으로 보장받아야 할 것입니다.

10. 마지막으로 적법요건과 관련하여 말씀드리면,

이 사건의 경우에는 이미 행정처분의 집행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행정처분의 취소 또는 무효 확인을 구하는 소송은 그 소의 이익이 부정될 가능성이 많아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는 외에 달리 효과적인 구제방법이 없으므로 보충성 원칙의 예외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또한 출입국관리법에 기한 보호, 강제퇴거 집행제도는 앞으로도 계속 시행될 것이 예상되므로 침해 반복의 위험성이 여전히 존재하고, 광범위한 법적 공백 상태에서 관행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출입국 행정에 대하여는 아직 헌법적 해명이 이루어진 바 없어 이에 대한 헌법적 해명의 필요성이 있어 심판의 이익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상의 이유로 이 사건 심판대상 행위에 대하여 위헌결정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2011. 5. 12.(목) 민변 여성인권위원회 월례세미나 - 유연근무제(일명 '퍼플잡')에 대하여

국미애(2010)의 '퍼플잡' 등 여성노동 유연화 담론의 문제점'의 글 중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 그 자체는 이제 부정될 수 없는 정당성을 확보한 듯하다. 그런데 경제활동 지원 정책이 꾸준히 실시되고 있고, 전통적인 의미의 생계부양자로서 남성의 경제적 지위가 약화되고 있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기는 하나, 이것이 성별분업 해체라는 목표를 향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예컨대, '양성평등', '남녀고용평등' 등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향으로 정부정책과 관련 법, 제도의 변화가 이루어져왔지만, 그것이 어떤 평등을 지향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질문의 대상이다. 특히 '저출산'과 '고령화'가 국각적 의기로 급부상하기 시작한 이후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는 '일-가족 양립'이라는 화두가 <남녀고용평등법>의 법명이 <남녀고용평등 및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로 바뀌고, 관련 주제의 여러 '대형' 정책연구물이 생산되고, 이를 토대로 중장기계획이 산출되는 등의 가시적인 결과물을 가져왔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들은 주된 정책대상을 여성으로 설정하게 되는 현실적 필요와, '여성의 이중부담을 줄여주는 정책'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남성을 여전히 '열외'로 남겨두는 치명적인 한계 사이에 위치해 있다.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유연근무제 도입이 불가피하다", "유연근무제는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을 높인다"는 명제는 어떤 가치와 규범을 담지하고 있는가?

시간제공무원제도의 도입이 여성 및 노년층의 고용 기회를 확대하여 노동시작의 분절화에 대처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하위직급과 기혼여성 중심으로 시간제근무를 한다고 할 때, 오히려 업무간의 위계가 더욱 분명해지면서 특정 업무가 주변화 되고, 이에 성별과 직급, 혼인상태를 중심으로 공직사회의 분절화가 급속하게 진행될 우려가 있다.

단시간근로가 '양질의' '괜찮은'일자리가 되기 위해 어떤 조건이 선결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생략한 채 당장의 필요에 의해 여성을 단시간 노동력으로 사고하는 전형을 보여준다. 요컨대, 여성의 노동을 단시간 근로로 특수화하는 방식의 일자리 확대는 젠더 관념의 반영지아 그 결과물인 것이다. '기혼여성'이 단시간근로자의 다수를 구성한다는 것은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지금, 이들의 단시간근로에는 자발적 선택, 개인적 선호이자 욕구라는 외피가 덧씌워진다. 그렇기에 성별분업 강화가 문제시되기보다는 노동시장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가족시간도 충분히 가지려는 개별노동자들의 행위 전략으로 위치지어진다. 이들의 논의에서 전제하고 있는 여성은 기혼여성, 그 중에서도 남성배우자가 생계부양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고 있는 기혼여성이다.

신경아(2010)는 발제자들이 시간제고용을 매우 필요하고 바람직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음을 짚어내면서 필요성이 곧 긍정적인 결과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현실적 조건상 불가피한 요구가 발생할 수 있지만, 그것이 곧 제도적 가치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것인가

공직사회는 전일제의 정규직근로 모델을 표준으로 유지하면서 시간제근무를 '표준에서 벗어난' 경로로 의미화하고, 표준적 경로와 비표준적 경로에 배타적으로 성을 할당하는 성별화 과정을 거칠 가능성이 높다.

유연근무제가 '일-가족 양립'이라는 구호 아래 자신을 위치시키는 한 유연근무제는 고유의 장점을 살릴 수 없다. 혼인상태와 배우자유무, 자녀유무라는 가족상황에 의해 적격 여부가 결정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성애 핵가족이 규범으로 작동하는 사회에서 키워야할 자식도, 내조를 원하는 남편도 없는 독신여성에서 '일-가족 양립'은 어울리지 않는다.  노동시간의 유연화는 '일-가족 양립'이란 편협한 전시성 행정의 우산을 벗어나 개인'들'의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전반적인 사회 변화의 맥락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2011. 5. 13.(금) 이주연구모임 - '다문화'란 무엇인가?

1. 김현미(2008), '한국에서의 다문화주의, 한국사회 다문화담론과 정책'의 글 중

"이주자들에게 '한국식'으로의 동화 또는 무권력, 침묵 이외에는 선택할 것이 주어지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마치 동화주의와 다문화주의적 입장이 각축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만드는 것 자체가 허구적일 수 있다. 이 논쟁은 적어도 가족이민이 허용되고, 소위 '불법' 이주자도 시간이 지나 체류국에서의 체류권이나 영주권을 얻어 정착이 가능했던 국가들에서 일어날 수 있다.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한국은 이민 수용 국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의 다문화정책의 부재와 다문화주의의 남용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다인종, 다민족, 다문화 사회로 이행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대적 전환기에 다문화주의 논의를 어떤 방식으로 공론화시키느냐는 시민사회가 수행해야 할 정치적 개입이다.

첫째로, 아직 한국에서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나 결혼 이주자들의 일상적 차원에서 이들 문화에 대한 사회적 인정이 시급하다. 둘째로, 문화권의 핵심은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대표할 권리는 누가 가지느냐이다.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현재 국가, 시민사회, 이주민 그룹들 간의 의미를 둘러싼 경합을 벌이고 있다. 원래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주의란 말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시민사회와 이주노동자를 지원하는 NGO 등을 통해서였다. 단일민족에 기반을 둔 국민주의가 만들어내는 인종적, 성적 계급적 등 다양한 폭력들을 통해 이주 노동자, 혼혈인, 결혼 이주자의 인권이 심각하게 침해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NGO나 시민 사회에서 다문화주의는 그것이 일반적으로 내포하는 문화적 차이에 대한 상호 인정과 승인의 의미보다는 한국의 단일문화주의의 폭력성에 대한 대항적 개념이었다. 그러나 다문화주의, 다문화란 용어가 정부에 의해 차용된 2006년 이후, 시민단체를 비롯한 민간단체들을 "다문화가족 관련 위탁사업을 수령하려고 경쟁적으로 나서게 되자 시민사회에서 자성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윤인진). 무엇보다도 다문화주의를 주도해야 할 주요 행위자인 이주민들의 법적 지위의 한계 때문에 그들에 의한 광범위한 투쟁이 일어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다문화주의는 곧 정착형 이민자인 결혼이주자에 대한 논의로 귀결 또는 협소화되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다문화주의가 국가에 의해 '차용'되면서 정책적 실체가 없이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다. 다문화주의의 국가적 '차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질 수 있는데 하나는 정착형 결혼이주자들의 사회 통합을 위한 담론으로, 다른 하나는 글로벌 경제로의 적극적인 편입을 위한 고급 인력 유치와 '코스모폴리탄'적 소비자를 만들어내기 위한 신자유주의 담론의 하나로서이다. 실제 다문화주의의 정치적 이상과는 매우 거리가 먼 정책들이 현재 한국 사회의 다문화주의 정책 담론을 지배하고 있다. "
 

2. 엄한진(2006), '전지구적 맥락에서 본 한국의 다문화주의 이민논의'의 글 중

"문화 없는 다문화주의

<이주노동자>와 <외국인노동자>를 검색어로 얻어진 지난 2005.12.~2006.11 언론기사를 주제별로 나누어본 결과 <다문화>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한국의 이민논의에 정착 이민자들의 문화적 측면, 한국에서의 이들의 문화생활, 종교생활, 일상문화에 대한 부분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의 사고방식 및 문화생활, 일상생활과 같은 구체적인 문화에 대한 무관심은 이민 담론이 이민자들의 주체성을 무시하는 경향과 맞물려 있다. 한국인이 주도하는 시도들이 미디어를 독점하는, 온통 우리의 미덕으로 미디어가 채워지는 양상은 암묵적으로 이민자들을 대상화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2011년 4월 27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318호 법정. 항소심 마지막 공판 날이었다. 방청석은 비어 있었다. 관심이 지나간 자리에 인권활동가들은 피고인 신분으로, 그 옆에는 변호인들만이 남아있다. 2009년, 용산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을 요구하는 집회를 주최하였다는 이유로 이들은 지금도 재판을 받고 있다.

1심 법원은 용산범국민대책위의 공동집행위원장이었던 박래군에게 징역 3년 및 1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이종회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이들이 불법폭력집회시위를 주최하고, 교통을 방해하였다는 이유였다. 우리는 항소했다. 그 항소심 선고가 다음주 5월 18일 오전에 있다.

무엇보다, 불법폭력집회를 주최하였다는 점을 인정할 수가 없다. 용산범국민대책위는 100여개의 시민․사회단체로 조직된 연대조직이다. 이들은 폭력사태를 의도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실제로 이들이 주최한 범국민 추모대회는 기본적으로 비폭력, 평화적인 추모제 기조를 유지하였다. 이는 검찰이 압수한 회의자료, 당시 기자회견 자료 및 기사에도 나온다. 추모대회에 참가한 사람들 손에는 무기가 아니라 국화와 촛불, 그리고 피켓이 들려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경찰은 당시 용산참사와 관련한 모든 집회는 금지했고, 1인시위 마저 봉쇄했다.

한편, 대규모 집회에서는 일부 참가자의 우발적인 폭력행위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독일연방헌법재판소 등은 대규모 집회에서 참가자 일부의 행위에 대하여 시위 전체나 주최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을 제한하고 있다. 주최자가 의도하지 않은 일부 참가자의 우발적, 개별적인 폭력행위까지 주최자에게 법적 책임을 지우는 것은 집회의 자유를 위축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모대회는 용산범국민대책위의 활동 중 일부에 불과했다. 용산범국민대책위는 추모대회 이외에도 정말 다양한 노력을 해왔다. 1만 시민기소인들이 만든 용산 국민법정,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매일저녁 생명평화미사 봉헌, 용산참사 현장에서 진행된 설치미술, 연극제, 문인 사인회, 철거민 구술집 『여기 사람이 있다』 발간, 용산 유가족 돕기 콘서트 ‘라이브 에이드’ 개최, 미술 전시회 <망루전> 개최 및 지방 순회 전시, 등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문화, 예술, 종교, 정치계 인사들과 함께 용산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수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런데 검찰과 법원은 ‘불법집회’, ‘일반교통방해’라는 틀로만 세상을 보고, 이들이 폭력적이라고 단죄한다. 검찰과 1심 법원은, 박래군, 이종회 활동가가 추모대회를 주최하면서 폭력사태를 의욕하고, 이를 결정적 투쟁을 위한 기반으로 만들려고 했다고 한다. 이를 입증할 증거가 없는데도 말이다.

박래군 활동가는 앰네스티에서 올해의 양심수로 선정이 되어 세계 각국에서 탄원편지가 오기도 하였다. 국가는 인권옹호 활동에 대한 보호의무가 있다. 국가가 인권침해를 적절히 막지 못한 경우 인권활동가가 최후의 보루가 될 수밖에 없고, 인권활동가는 자신의 인권옹호 활동으로 정치적 표적이 될 수 있으므로 각별히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 유엔총회에서 채택한 ‘인권옹호자 선언(1998년)’의 내용이기도 하다.

항소심 재판부에 많은 걸 기대하지 않는다. 최소한 객관적 증거에 의한 사실 확정과 법관의 양심에 따른 판결을 하길 바랄 뿐이다.

 

                                       *지난해 4월, 구속 110여일 만에 보석으로 석방된 박래군, 이종회 활동가

- 글 장서연 변호사


 

-트랜스젠더 수용자 처우에 관한 외국사례와 시사점

* 인권오름 249gh 벼리 꼭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hr-oreum.net/article.php?id=1771

2006년 한국에서 한
MTF(male to female, 남성에서 여성으로) 트랜스젠더(trans gender, 성전환자)가 남자교도소에 수용되어 있다가 여성용 내의와 호르몬치료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자신의 성기를 절단하는 자살시도를 한 사건이 있었다. 그녀가 자살시도에 이르기까지 교도소 측은 적절한 상담이나 처우, 의료적 지원을 제공하지 않았고, 그녀의 고통에 귀를 기울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국에도 법무부가 2003년에 만든 ‘성전환자 수용자 수용처우에 관한 지침’이 있다. 그런데 이 지침은 ‘성전환자’를, “성전환수술 등으로 남·여 성별이 불분명한 자”로 제한하고 있고, “성전환자 수용자를 독거 수용하라”라는 내용 외에 트랜스젠더 수용자들이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 대하여 구체적인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제12조는 “남성과 여성은 분리하여 수용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남성과 여성, 양성을 전제로 하고 있고, 성별을 어떻게 결정할지에 대한 내용은 없다. 기존에는 성별을 남성과 여성, 양성을 전제로, 출생시 외부성기를 기준으로 결정하여 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인간의 성별을 결정하는 데는 생물학적 측면 외에도 정신적, 사회·심리학적인 요소 등 다양한 성별결정요소가 복합적으로 연계되어 작용하는 것으로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녀 이분법은 트랜스젠더의 경험을 온전히 담보하지 못한다. 즉, 남녀라는 성별로 확고하게 구분된 구금시설에서 트랜스젠더 수용자는 모든 영역에서 배제를 경험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교도소에 입소하면서 어느 수용시설에 배치될 것인지 문제에서부터, 정체성에 맞는 의복이나 화장품 지급, 호르몬치료나 성전환수술의 보장여부, 다른 수용자나 직원들로부터의 괴롭힘이나 성폭력의 위험 등에 직면하게 된다.

미연방법원의 판결, “호르몬치료를 거부하는 것은 잔인하고 비정상적인 처벌”

미국에서는, 트랜스젠더 수용자의 처우와 관련하여 이미 여러 가지 논쟁들이 있었다. 트랜스젠더의 인권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교도소에서 트랜스젠더 수용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 단계적 지원으로 1) 성정체성에 맞는 의복의 착용과 적절한 화장의 허용, 2) 심리적 지원, 3) 호르몬 치료, 4) 성전환 수술 등을 들고 있다. 즉, 교도소에서 트랜스젠더 수용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지원은 성정체성에 맞는 의복의 착용과 적절한 화장을 허용하는 것이다. 성정체성에 맞는 의복의 착용과 화장은, 트랜스젠더 수용자들에게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 특히 중요하기도 하고, 구금시설에서도 가장 쉽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교도소 내에서 트랜스젠더 수용자들이 호르몬 치료를 받을 권리가 있는지에 관한 격심한 논쟁은 여러 건의 소송으로 이어졌다. 과거에 미국 법원들은 수용자들이 호르몬 치료나 성전환 수술을 받을 수 없다고 일관되게 판결했지만, 최근 미국법원의 경향은 ‘성주체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는 심각한 의료적 지원이 필요하며, 성주체성장애자를 상대한 경험이 있는 전문가의 주도 하에 정신과 진료가 이루어져야 하고, 만약 호르몬 치료나 성전환 수술 등이 의료적으로 필요하다면, 이러한 의료조치에 대하여 단순히 비용이나 여론 때문에 거절하는 것은 미 연방 수정헌법 제8조 잔인하고 비정상적인(cruel and unusual) 처벌금지를 위반한 것’이라고 판결하고 있다.

미국의 트랜스젠더 수용자들은 일관되지 못한 정책으로 인하여 소송을 통하여 개별적으로 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미국 교정국의 정책은 유지정책(one of maintenance)을 취하고 있다. 구금 이전에 호르몬 투여를 시작했던 수용자와 호르몬 치료를 시작하지 않았던 수용자를 구별하고, 구금되는 동안 성정체성 혼란의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한 호르몬 치료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

영국 법무부, “트랜스젠더 수용자 정책” 발표

영국 법무부는 한 발 더 나아가, 2011년 3월, ‘트랜스젠더 수용자의 보호 및 관리(The Care and Management of Transsexual Prisoners)’라는 정책을 발표했다. 이 정책은 트랜스젠더 수용자들에 대한 의료적 처우, 교도소 내 배치, 개명(호칭), 신체검사, 복장규정, 물품사용, 안전관리 등에 관한 기준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지침에 의하면, 교도소는 트랜스젠더 수용자들에게 수감되지 않았더라면 NHS(영국 공공의료서비스, National Health Service)로부터 받았을 치료와 동등한 치료를 제공할 의무를 진다. 이는 상담, 성전환수술 전후 관리 및 지속적인 호르몬치료를 포함한다. 만약 수용자가 교도소에 수감되기 전부터 의학적 치료를 받았었고 지속적인 치료를 요구한다면, 교도소 내 성주체성 전문가가 수용자에게 맞는 다른 치료를 권하기 전까지는 이전부터 받던 치료가 지속되어야 한다. 수용자가 성전환수술을 요청하는 경우에는 교도소 의료진은 성주체성장애 전문가에게 알릴 의무가 있으며, 평상시에도 성전환수술의 필요여부에 대해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할 필요가 있다.

또한 수용자가 자신의 신체 일부분이나 성별과 관련 있는 다른 특징들을 바꿈으로써 성전환을 원하거나, 성전환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경우, ‘평등법 2010’에 의해 보호를 받으며, 성전환을 이유로 차별을 당하거나 학대를 받아서는 안 된다. 트랜스젠더 수용자들은 자신들이 지향하는 성별에 적합한 의복을 입도록 허용되어야 하고, 자신이 원하는 이름과 호칭을 사용할 수 있다. 수용자는 성전환을 이유로 개명신청을 할 수 있으며, 그럴 경우에는 ‘Mr’ ‘Ms’와 같은 호칭도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트랜스젠더를 수용시설에 배치할 때는, 법적으로 성전환이 인정된 수용자들은 법적으로 인정된 성별에 따라 배치한다. 법적으로 성전환이 인정되기 전의 트랜스젠더의 경우에도 다른 수용자들과의 위험요소, 전문가 의견, 수용자 본인이 어디에서 가장 안전함을 느끼는지 여부 등을 고려하여 재배치할 수 있다. 배치문제는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법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배치를 목적으로 한 신체검사는 금지된다.

구금시설에 있는 트랜스젠더의 성정체성을 최대한 존중해야

영국의 정책을 보면, 트랜스젠더 수용자에 대한 처우를 각 상황에 따라 다르게 결정함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MTF 트랜스젠더가 수용시설의 배치에 있어, 법적으로 성별변경 전이거나 성전환수술 전이어서 남성 수용시설에 배치되게 되더라도, 그 안에서 여성 수용자로서 대우를 받고 성정체성에 적합한 의복이나 화장이 허용되고, 호르몬치료 등 의료적 처우를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트랜스젠더들도 하나의 범주로 묶기 어려울 정도로 천차만별이고, 성전환에 대한 욕구나 진행정도가 다양하기 때문에 획일적인 기준을 적용할 수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트랜스젠더를 성전환수술을 하거나, 성전환수술을 원하는 사람으로 한정하여 생각한다. 이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정형화된 선입견이다. 트랜스젠더 중에는 성전환수술이나 호르몬 치료를 원하는 사람도 있지만, 수술을 하지 않았거나 원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트랜스젠더는 성전환수술 여부나 호르몬 치료 여부와 무관하게 스스로 어떠한 성별로 자신을 인식하고 있으며,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지가 중요하다.

이는 구금시설의 트랜스젠더 정책에서도 마찬가지다. 트랜스젠더는 기왕의 호르몬치료 여부나 성전환수술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주관적 인식과 욕구가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트랜스젠더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헌법 제10조 행복추구권으로부터 파생되는 자기결정권에서 도출되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한국 대법원도 이미 2006년 성전환자의 성별정정을 인정하는 판결을 하면서 “성전환자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향유하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있다.”고 하여 헌법상 권리를 인정했다. 트랜스젠더 수용자들은 가능한 인간존엄성에 상응하도록 구금시설 안에서도 자신의 성정체성에 적합한 처우를 최대한 보장받아야 한다. 정부는 구금시설에 있는 트랜스젠더 수용자들이 형벌로서의 자유구속 이외에 이중의 고통을 겪지 않도록, 그 고통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트랜스젠더 수용자를 위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글 장서연 변호사
 

* 친구사이 소식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2011년 3월 31일, 이동흡 재판관의 입에서 “동성애 성행위는 객관적으로 혐오감을 일으키고 선량한 도덕관념에 반하는 행위”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여기가 대한민국헌법을 해석하고 심사하는 최상위 사법기관인 헌법재판소의 법정이 맞나?’

헌법재판소의 합헌결정에 대하여 법률전문가의 관점에서 칼럼을 기고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런데 법률가가 아니어도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은 “동성애 허용하면 우리국군 무너지고 김정일만 좋아한다”, “상명하복 조직 속에서 상급자가 하급자를 성폭행하는 일이 빈번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는 동성애 혐오로 가득한 ‘바성연’의 억지 주장과 차이가 없다는 것을.

헌법재판소가 들고 있는 이유들을 보자,

“‘추행’이란 정상적인 성적만족 행위에 대비되는 것이고, ‘계간’은 ‘사내끼리 성교하듯이 하는 짓’으로 남성 간의 항문성교를 뜻하고, ‘추행’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군의 성적 건강, 국가안보를 위하여 동성 군인 간의 성적만족 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적절한 수단이다”

동성 간 성행위가 혐오감을 일으키고 정상적인 행위가 아니라고 한다면, 혐오감을 느낀다는 주체는 누구이고, 성적만족 행위의 정상성을 결정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아마도 재판관님들은 이성간 정상체위만 하시나보지. 항문성교나 구강성교, 69체위는 변태적이니까. 그들에게 ‘동성애는 이성애, 양성애와 마찬가지로 이미 의학적, 심리학적으로 가치중립적인 하나의 성적지향으로 분류되고 있다’는 설명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동성 간의 성적 행위와 이성 간의 성적 행위에 대한 차별은 헌법상 차별을 금지한 영역인 남녀차별의 문제가 아니며, 헌법에서 특별히 평등을 요구하고 있는 경우에도 해당하지 않고, 차별적 취급으로 인하여 기본권에 중대한 제한을 초래할 사정도 없다”, “동성애자의 평등권을 침해한다고 볼 수 없다”

1987년에 개헌된 헌법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다니.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적 취급으로 인하여 기본권에 중대한 제한을 초래할 사정이 없다니. 대한민국이 가입비준한 자유권규약, 사회권규약, 아동권리협약, 여성차별철폐협약에서도 성적지향에 의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인권이란, 보편적 권리가 아닌가. 소수자 집단에 대한 차별을 심사한다면서 완화된 심사척도를 적용하겠단다.

“군대는 혈기왕성한 젊은 남성 의무복무자들이 이성 간의 성적 욕구를 원활하게 해소할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 장기간의 폐쇄적인 단체생활을 해야 하므로, 일반 사회와 비교하여 이성 간의 성적 교섭행위보다는 동성 간의 비정상적인 성적 교섭행위가 발생할 가능성이 현저히 높다”

“특히 상급자가 같은 성적 지향을 가지지 아니한 하급자를 상대로 동성애 성행위를 감행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반하여 군대에서 이성 간의 성적 교섭행위가 빈번히 발생하여 이를 방치할 경우 군대를 위태롭게 할 우려가 크다고 할 수 없다”

“이 사건 법률조항은 쌍방 합의에 의한 성적 교섭행위는 군의 건전성과 군 기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처벌해야 한다” “폐쇄적으로 단체생활을 하면서 동성 간에 내무반, 화장실, 샤워실 등의 공간을 공동으로 사용하여야 하는 군대 내에서는 일반 사회생활에서와 달리 비정상적인 동성 간의 성적 교섭행위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는 점에서 동성 간의 성적 행위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다만, 민간인과의 사적 생활관계에서의 변태적 성적만족 행위에는 이 사건 법률조항이 적용되지 않는다”

가장 큰 오해 중 하나. 이 조항이 없어지면, 군내 동성 간 성폭력이 증가한다는 주장이다. 근거가 없는 거짓말이다. 이 조항과 별도로 군형법의 성폭력, 강제추행 처벌조항은 따로 규정되어 있고, 여전히 유효하다. 군내 동성 간, 또는 이성 간의 성폭력을 감소시키려면, 성폭력 친고죄 규정부터 폐지하고, 철저한 수사와 피해자를 위한 구제책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헌재의 인용을 다시보자. 동성 간의 성행위를 비정상적인 것, 사적 생활관계에서도 변태적인 행위로 전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성애자들은 마치 다른 성적 지향의 하급자를 상대로 동성애 성행위를 감행할 가능성이 높고,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간에서 성적 교섭행위를 일삼는 집단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은가. 동성애 혐오로 가득한 이런 문장을, 2011년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에서 읽게 되다니. 오늘도 어디에선가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게이들에게 미안하지 않나.

-글 장서연 변호사